20. 문득 발을 꼼지락거리자 발끝에 톡, 방금 떨어진 오이가 닿는다. 도르르 굴러가는 오이를 집어 올리고 싶어서 손가락이 근질거렸다. 사빈은 슬그머니 시선을 발아래로 보내 보았다. 데굴데굴 굴러간 오이는 어느새 테이블 아래로 삐죽 나와 있었다. 잡고 싶다. 부질없이 오이를 노려보았다. 눈이 아플 정도로 노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 머뭇머뭇 몸을 ...
19. 옷을 갈아입을 틈도 없이 우선 급하게 데운 수프와 레인지에 살짝 돌려 말랑말랑한 버터 바른 식빵을 트레이에 담아 들어가 보니 준태는 이불을 턱까지 덮고서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열이 높네.” 이마를 짚어보고, 미지근한 물을 한잔 마시게 한 후 늘어진 몸을 일으켜 뒤로 기대어 앉게 했다. 준태의 초점 없는 눈동자가 침대에 걸터앉은 현우의 ...
2. 차마 유진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슬럼프는 아주 단순한 것에서 시작됐다. 별것 아니라면 별것 아닌 일. 그래서 이찬은 더욱 유진에게 슬럼프가 시작된 이유를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단순한 일에서 시작돼 섭섭함과 불안함을 더해가며 눈덩이처럼 커진 그것이 이제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고 단순한 선 하나 그릴 수 없는 심각한 슬럼프가 됐노라고.
첨프 편집부의 막내 김명수는 항상 일등으로 출근하는 부지런한 기자였다. 수습 시절부터 어느덧 삼 년 차에 접어드는 현재까지 깜깜한 첨프 편집부의 불을 밝히는 일은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 그날도 가장 먼저 활기차게 사무실로 들어서던 김명수 기자는 갑작스럽게 걸려온 강이찬의 전화에 저도 모르게 제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아직 선배들도 다 출근하지 않은 이런 이...
19. “으아. 춥다, 추워. 봄은 언제 오는 거야?” 아직 2월 초인데 우현은 때 이른 봄 타령을 하며 연습실에 들어섰다. 언제 온 건지, 사빈은 벌써 편하게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설렁설렁 몸을 풀고 있다.
18. 현우가 집에 돌아온 건 일요일 점심 무렵이었다. 어머니는 저녁까지 먹고 가라고 잡았지만, 오빠를 보러 왔던 고모가 슬그머니 등을 떠밀었다. “현우도 가서 좀 쉬어야 내일 출근하죠.” 고모는 그렇게 말했다. 속내는 혼자 있을 준태 때문이란 것쯤 눈치채고도 남았다. 어머니의 표정이 차가워지는 걸 보며 현우는 냉큼 고모 편을 들었다. “집 청소하...
1. “다들 오늘도 고생 많이 했어. 일찍 들어가서 푹 쉬어. 주말 잘 보내고.” 퇴근 준비를 하는데, 데스크가 느릿느릿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기사 꼭지 정리한 파일을 읽다가 유진은 고개를 빼꼼 들고서 데스크를 보았다. 얼른 들어가서 쉬라는 말과 달리 데스크의 표정에는 알코올을 향한 강한 의지가 읽혔다. 한잔하고 싶구나, 딱 알 수 있었다. 하긴...
17. 굳이 핑계를 대려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아버지의 건강은 그럴싸한 변명거리가 되어주었다. 현우는 화경에게 무척 미안한 목소리로 아버지의 상황을 설명하고 이런 이유로 이번 구정은 아무래도 인사드리기 적당한 때가 아닌 것 같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화경은 무척 아쉬워하며, 집에 가기 전에 잠깐 얼굴 좀 보자고 했다. 인사는 못 가는 대신 뭐라도...
18. 돌아가는 길이 천 리처럼 멀었다. 열심히 운전하는데, 밟아도 밟아도 길은 끝이 없다. 집은 멀고 마음은 무겁고 눈앞은 희뿌연 했다. CD를 재생시켰다. 오아시스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자신의 것은 아니다. 이곤이 넣어둔 CD다. 밤샘 촬영을 마치고 찾아왔던 날, 오후 내내 자고 일어나서 저녁때 함께 드라이브를 갔었다. 그때 곤은 음악이 단조롭...
16. 종일 준태는 눈이 빠지게 현우를 기다렸다. 첫 토요일이었다. 나에게 손대지 않는 대가로 너와 일주일에 단 하루 애인인 척 지내주겠다고 현우가 약속한 그날 이후. 그러니까, 그 소리는 내일이 바로 서현우가 약속한 첫 번째 일요일이었고 처음으로 그와 애인처럼 하루를 지낼 수 있는 날이란 말이다.
2. “미친 거 아니야? 거기서 왜 그렇게 크게 웃어?” 예상대로 유진은 잔뜩 약이 올라 펄펄 뛰어댔다. 이럴 때는 적당히 분위기 봐가며 달래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이찬은 여전히 웃음기를 거두지 못했고 폭발하기 직전의 폭탄을 품에 꼭 안은 기분으로 명수는 말없이 발치에 구르는 돌멩이만 퍽퍽 소리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소심히 차댔다. 괜히 큰 소리...
사랑하는 애어들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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