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 열대야

42. “이혼해 주세요.” 예상치 못한 요구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다름없었다. 록헌에게만 온통 신경 쓰던 강준은 일순 헛들은 건가 싶을 정도였다.

41. 비 때문에 노면은 상당히 미끄러웠다. 틈틈이 브레이크를 밟아가며 달리는데도 몇 번이나 바퀴가 헛돌았다. 쏟아지는 빗물을 밀어내는 와이퍼가 정신없이 바쁘다. 빗줄기가 굵고 험난해 차선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헤드라이트가 소용없다. 마음은 더없이 급했지만, 강준은 최대한 침착하게 차를 몰았다. 운전대를 잡는 록헌을 반강제로 옆자리에 밀어 ...

40. 빗줄기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요란스럽다. 11월답지 않게 굵은 비였다. 얼마 동안 같은 자리에 앉아있었는지 록헌은 알지 못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기는 하지만, 그것을 확인해 보고자 몸을 움직일 생각 따위는 들지 않았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집 안이 그렇게 어두울 수가 없었다. 마치 밤처럼 까맣다. 까맣고 스산하다. 그는 손끝...

39.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 속에 근심 걱정을 가득 담은 얼굴로 큰어머니가 앉아 계셨다. 눈 부신 햇살과 선명하게 대비되는 큰어머니의 무거운 표정에서 시원은 암담한 미래를 보는 기분이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펑펑 울며 잘못했다고 빌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 “얘, 어쩜 밥 잘 안 챙기니? 어째 큰엄마 눈에는 네가 야위어 보인다.” 첫 마디는 야윈 ...

38. 종종 걷던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보았다. 회색이 드문드문 섞인 하늘은 무척 높고 꽤 푸르렀다. 스치는 바람에서는 짙은 가을 향이 맡아지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벌써 10월도 거의 다 지나서 며칠만 지나면 11월이다. 시간은 망설임이 없다. 물끄러미 하늘을 보다 주머니에서 울리는 휴대폰 진동에 시원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 왜?” [어디야?] “...

37. 시원을 응시하는 준석의 눈빛은 침착했다. 마치, 파도조차 치지 않는 바다와 같다. 그게 시원에게는 더욱 괴로웠다. 바람도 불지 않고, 파도도 치지 않는 적막의 바다. 정적의 바다. 모든 것이 죽어버린 쓸쓸한 바다. 시원이 슬그머니 입술을 깨문다. 괴로움이 순간 쓴 물처럼 거침없이 넘어왔다. 왜 하필 너야? 원망 비슷한 감정이 대뜸 치고 올라왔다. 안...

36. 머리 위로 내리쳐지는 의자를 보았을 때 록헌은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의자는 위협적인 소리를 윙하고 거칠게 쏟아냈다. 더불어 비명 같은 것이 언뜻 들렸는데 긴장 때문인지 아니면 워낙 거실 안의 분위기가 살벌한 난장판 그 자체여서 그런지 확실하지는 않았다.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빠르게 스쳤다. 그렇게 되면 시원이는 어떻게 하나. 우습게도 위기...

35.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남보다 특별히 훌륭하진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좋은 엄마가 되려고 노력해왔다. 소중하고 귀한 아이들에게 그 아이들이 필요로 할 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엄마가 되고자 늘 애써왔다. 부족한 점은 많아도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좋은 부모가 되고 싶었다. 욕심냈던 건 그것뿐이...

34. 꽉 닫힌 방문 앞에서 강준은 몇 번이나 왔다 갔다 고민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할지, 아니면 조금 더 놔둬야 할지 선뜻 판단이 서질 않는다. 벌써 몇 시간째. 점심도 건너뛰었다. 보나 마나 아침도 안 먹었을 테니 두 끼를 연속으로 굶은 셈이다. 곧 저녁 시간인데 이렇게 꼬박 굶도록 놓아두어도 괜찮은 걸까. 심신이 허할 때는 밥이라도 든든히 먹어두어...

33. “록헌이 아빠를 사고로 잃고 장례식을 치르는 내내 제일 미안했던 사람이, 록헌이였다.” 너희는 형제라고 짧고 단호하게 끊어 말한 후, 어머니는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낮게 가라앉은 침착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조용한 음성 안의 단호하고 강한 힘은 그대로였다. “부모는 말이다, 시원아. 자식을 낳으면 그 순간부터 아이에게 책임이 있는 거란다. 그 아...

32. 모처럼 만의 외출은 엉망이 됐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내내 시원은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열지 않았다. 그런 시원이 신경 쓰였지만, 괜히 이것저것 물었다간 화를 낼 것 같아서 록헌은 보조를 맞추어 함께 걷기만 했다. 여름은 분명 여름이었다. 여덟 시가 다 됐건만 아직도 해가 떨어지지 않았다. 좀 더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씁쓸하게 ...

31. * * “이게 뭐야?” 평소답지 않게 20분 정도 늦게 나타난 준석은 굉장히 들뜬 얼굴이었다. 늦어서 미안하다고 싹싹 빌면서도 입은 미소를 감추지 못하더니, 머뭇거리며 내미는 손에는 예쁜 목걸이가 놓여있었다. “뭐긴 뭐야, 목걸이지.” 목걸이를 처음 보냐는 듯 태연하게 웃는 입술 끝이 긴장하는 것을 시원은 바로 알았다. “목걸인 건 아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