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 모래성

59.

58. 여전히 전화기가 꺼져 있다. 이 녀석이 웬일로 전화기를 다 꺼놓았을까. 의아해하며 철진은 휴대전화를 닫았다. 뭔가 께름칙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영 기분이 개운하지 않았다. 오늘 보스가 중국에 간다. 공항에는 건우가 은재를 보디가드 해 나갈 거라고 했다. 용호는 오늘 은재에게 가지 않아도 된다고 좋아했다. 그러니 지금쯤이면 벌써 아파...

57. 12월 28일 아침 7시 57분. 건우는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유난히 바람이 차가운 아침이었다. 햇볕 따뜻한 날씨가 무색할 정도로 매서운 바람이 쌩쌩 불어와 집을 나서면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아파트까지의 그리 멀지 않은 거리를 걸으면서 건우는 몇 번이나 몸을 움츠리고 어깨를 떨었었다. 어쩌면 떨리는 건 가슴일지도 모르겠다고 ...

56. 『내가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면 형은 지금보다 행복해질 수 있어?』 그렇게 묻던 은재의 목소리가 어떠했던가. 퓨즈가 나가버린 머릿속 귀퉁이에 대롱대롱 매달린 심정으로 준혁은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떠오르지 않는 음성을 억지로 기억해 내려 애쓰고 또 애썼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아무리 노력해 봐도 그렇게 묻던 은재의 목소리가 어떠했는지 어떤 ...

55. 새벽까지 시끄러웠던 지구대 업무를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갈 준비를 하는 중이었던 순경은 갑작스럽고도 예상 밖인 방문자에 놀라 엉거주춤 의자에서 일어섰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사람은 은재였다. 반갑기도 했지만, 나란히 들어서는 준혁의 모습에 반가운 마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불길하고도 떨떠름한 긴장이 발바닥부터 빠르게 타고 올라왔다. ...

54. 준혁의 시선이 화단에 머물렀을 때 건우는 심장이 툭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두려움이 등골을 타고 빠르게 올라왔다.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흩트리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어차피 지금 화단엔 아무것도 없다. 꽃이 진 나뭇가지가 벌개미취인지 장미인지 애초 준혁이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화단이 있구나.” 대...

53. 확실히 오늘 남편은 평소보다 조금 들떠 있었다. 그것이 꼭 활기 넘치고 즐거워 보인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상당 동안 계속되어 오던 긴장을 살짝 내려놓은 듯한 모습만으로도 아내로서 안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일과 차를 준비하며 아내는 곁눈으로 남편을 보았다. 좋은 일이 있었냐고 묻고 싶어 가슴이 간질거렸다. “오늘은 어땠어요?” 차를...

52. 『엄마가 그랬는데 까, 까, 까…… 무슨 고기를 먹으면 기억이 안 나는 거래.』 영훈이는 마루에 앉아 발장난을 치며 통통한 볼을 오물거렸다. 물뿌리개를 들어 올리며 은재는 영훈을 돌아보았다. 골목을 얼마나 뛰어다니며 노는 지 피부도 까무잡잡하고 한쪽 무릎엔 큼직한 딱지가 앉아있는, 한눈에 보기에도 못 말리는 개구쟁이다. 그래도 오뚝한 ...

51. 방문을 열자 소독약 냄새에 뒤섞인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은재는 문 앞에 서서, 손잡이를 잡은 채 잠시간 꼼짝하지 못했다. 깜깜한 방 안 풍경이 눈에 익는 것이 무서웠다. 어둠이 익숙해진 눈에 보일 그의 모습은 과연 어떨까. 두려운 일이었다. “괜찮아요. 말했잖아. 별로 심하게 다치지 않았다고.” 일부러 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영...

50. “운이 좋네요? 다시는 못 만나는 줄 알았거든요. 그때 이후 또 안 보이지, 몇 번을 찾아가 봐도 언제나 없고. 그래서 완전히 포기하고 어쩔 수 없구나 마음 비웠는데…….” 악의라곤 조금도 없는 들뜬 목소리였다. 웃는 얼굴도 그렇고, 은재의 손을 덥석 잡는 손길에도 솔직한 반가움이 넘쳐흘렀다. 착한 사람의 순수한 마음. 순수한 기쁨. ...

49. 준혁은, 성렬이 송구스러워하며 내민 라이터를 무시하고 쯧쯧 혀를 찼다. 불편한 듯 보이는 보스의 기색에 지레 겁먹은 성렬은 혹시 자신이 실수한 건가 싶어서 조마조마한 얼굴로 데룩데룩 눈을 굴렸다. 충성심이야 흠잡을 데 없지만, 머리를 쓰는 일은 흠잡을 곳투성이인 부하를 준혁은 근엄하게 응시했다. 담배를 빨아들이는 동작이 느릿하면서도 위압...

48. 식사 내내, 집에 돌아오는 동안에도 분위기는 더할 수 없이 좋았다. 취리히에서의 일을 추궁당할 거라 각오하고 있었는데, 준혁은 한마디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어찌 보면 준혁답기도 하지만, 보이는 것만큼 속도 평온하지는 않을 터이니 결국, 틈을 노리는 것이라고 은재는 판단했다. 슬쩍 말머리를 끄집어내면 꼬리를 잡고 늘어질 것이 뻔하다.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