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 미치다

봄 햇살, 여름 태양

5. 올겨울은 예년보다 특별히 춥지는 않을 거라더니 12월이 되었건만 아직 첫눈도 오지 않아서 겨울이 시작되려면 한참 남은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남보다 추위를 많이 타는 빈은, 목까지 끌어올린 폴라 셔츠를 입고도 춥다고 몸을 웅크리곤 해서 선재는 항상 두르지도 않는 목도리를 목에 걸고 학교에 오기가 일쑤였다. 만나면 앵무새처럼 바로, 추워,...

봄 햇살, 여름 태양

4. 선재가 다급하게 울리는 전화를 받은 것은 다음날 이른 아침이었다. 현장에서 사고가 있었고 소장인 아버지가 부상을 당해 병원으로 후송돼 갔다는 현장직원의 전화였다. 전날의 깔끔하지 않은 기분 덕에 잔뜩 가라앉아 전화를 받았는데 사고와 병원, 두 글자만으로 머리 안이 하얗게 바랐다. 숨이 턱 막혔다. 두려움이 순식간에 온몸을 덮쳐왔다. 당장 내려...

봄 햇살, 여름 태양

3. 바람이 꽤 사납게 불어 체감 온도가 상당히 내려간 날들이 며칠간 계속됐다. 흡사 초겨울날씨였다. 옷도 두툼해지고, 자꾸만 따뜻한 곳을 찾게 된다. “그러고 보니까 수능시험이 얼마 안 남았어. 그래서 갑자기 추워진 걸지도 몰라.” 도서관에 교재를 반납하러 간 선재를 기다리며 빈은 무척 추운지 몸을 웅크렸다. 파랗게 질린 입술 사이로 흰 입김이 쏟...

봄 햇살, 여름 태양

2. 저녁까지 환갑잔치가 이어질 거란 말에 선재는 서울에 급한 볼일이 생겨 올라가야 한다고 어른들께 양해를 구했다. 환갑잔치에 참석하겠다던 아버지는 현장에 일이 생겨서 꼼짝할 수 없다고 아침에 연락이 왔고, 잔치라고 해도, 가족끼리의 조촐한 잔치는 이미 어제저녁에 마친 뒤였다. 오늘은 동네 어른들을 모셔두고 벌이는 큰잔치라 물론 그런 자리에 있어야...

봄 햇살, 여름 태양

봄 햇살, 여름 태양 (미치다, 그 후 이야기)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비가 올 것처럼 우울한 잿빛 하늘 아래를 걷고 있었다. 사람이라곤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거리에, 바람마저 죽어버려 세상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그 거리를 무엇 때문인지 열심히 걷고 있었다. 가파른 비탈길을 힘겹게 올라가는데 거의 끝에 이르렀을 때 바람이 불어왔다. 이마를 스치는 ...

56. 그날은 아침부터 눈이 펑펑 왔다. 덕분에 오후가 되었을 때는 발이 쑥쑥 빠질 만큼 눈이 쌓여 있었다. 그래도 눈은 멈추지 않았고 꽤 두툼하게 쌓인 거리 위로 하얀 눈송이들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휘날리는 눈송이에 가려져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올겨울 내릴 눈이 한꺼번에 몽땅 내리는 것만 같았다. 다른 때라면 분명, 이렇게 눈이 ...

55. 저돌적으로 입술을 부딪쳐오는 빈이 어색해서 솔직하게 받아주지 못하고 주춤거리는 선재를 자극하려고 작정했는지 빈은 끈질기게 그의 입술을 쓰다듬고 핥아댔다. 마침내 더는 참을 수 없어진 선재가 이제는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 빈의 등 뒤로 손을 둘러 당겨 안았다. 몸이 밀착되며 입술이 열리고, 혀가 뒤엉키기 시작했다. 뜨거운 입맞춤이었다. 수증...

54. [그래서. 오늘도 영 컨디션이 안 좋아?] 걱정스럽게 묻는 말투는 다정하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감정까지 온화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 정도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는 만큼 빈은, 살짝 긴장했다. 그렇다고, 물론 긴장했다는 티를 대놓고 낼 수도 없어서 최대한 힘없는 목소리로, 응, 이라고 대답하는 것이 전부였다. [어디 아픈 건 아니고?...

53. 익숙한 아파트가 점점 가까워지자 서두르던 걸음은 반대로 자꾸만 느려졌다. 아파트 정문에서부터 선재의 집까지가 천 리쯤 되는 것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그만큼 내딛는 걸음은 또 어찌나 무거운지. 결국, 빈은 벤치에 주저앉아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는 크게 숨을 쉬며 조금 전의 상황을 찬찬히 되짚어 보았다. 선재의 집으로 오라는 어머니의 전화...

52. 12월 31일의 거리엔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밤이 되면 더 많은 사람이 몰려나올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오후의 거리는 한산한 편이었다. 엊그제 꽤 많은 눈이 내린 후 기온이 뚝 떨어진 덕분에 길거리 여기저기가 빙판이었다. 빙판길을 아슬아슬 걸어가는 빈은 좀 서두르고 있었다. 약속에 늦을 것 같았다. 요 며칠 동안은 늘 그랬지만, 어제...

51. 괜찮으면 내일 좀 봤으면 좋겠다는 빈의 전화를 받고 준연은 한숨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복잡하고 심란했다. 보자는 의미를 좋은 쪽으로 해석해야 할지 아니면 나쁜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지 뚜렷하게 이거다, 라고 판단할 수가 없었다. 꼭 한쪽 발만 구름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놓은 기분이었다. 밤새도록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끙끙거린 덕분에 동틀...

50. “씨발. 전화도 안 받아. 개자식 같으니라고.” 직접 선재에게 따지겠노라고 몇 번이나 통화를 시도하다, 끝내 형준은 버럭 소리 지르며 휴대폰을 신경질적으로 끊고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불만이 많은 형준의 목소리도, 자기가 미안할 일도 아니건만 괜히 미안해하며 우리라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고 달래는 현성의 목소리도, 빈에게는 조금도 들리...